알콩달콩 그리고 현실
100일이라고 나는 큰맘 먹고 비싼 선물을 준비했다. 며칠을 고민해서 고른, 누가 봐도 돈 좀 들인 거였다. 그런데 그 사람이 내민 건 두꺼운 책 한 권이었다. 펼쳐보니, 우리가 처음 나눈 카톡 대화부터 100장을 골라 전부 인쇄하고 손으로 코멘트를 단 직접 만든 책이었다. "우리 100일치 대화 모았어." 나는 그 자리에서 할 말을 잃었다. 돈으로 진심을 이기려 했던 내가 부끄러웠다. 시간과 정성은 어떤 가격표로도 살 수 없는 거였다. 그날 이후로 나는 선물을 고를 때 가격이 아니라 시간을 먼저 생각한다.
한밤중에 장염이 심하게 와서 결국 응급실에 갔다. 혼자 끙끙대며 링거를 맞고 있는데, 새벽 3시에 그 사람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손엔 어디서 구했는지 따뜻한 죽이 들려 있었다. 그 시간에 문 연 데도 없었을 텐데, 어떻게든 죽을 구해 왔다. 옆에서 밤을 새우며 내 등을 쓸어줬다. 다음 날 회사에 지각해서 깨졌다는 얘기를, 그것도 웃으면서 했다. "너 챙기느라 그런 건데 뭐." 사랑은 결국 자기 손해를 농담으로 만드는 능력이더라. 자기가 치른 대가는 가볍게 넘기고, 내 끼니부터 걱정하는 사람. 그 새벽의 죽 한 그릇을, 나는 평생 못 잊을 거다.
어느 날 그 사람이 갑자기 말했다. "이번 주말에 ○○ 생일이지? 케이크 예약해놨어. 같이 챙기자." 내 절친 생일이었다. 순간 멍해졌다. 정작 나도 깜빡하고 있던 친구 생일을, 그 사람이 나보다 먼저 챙기고 있었다. 그것도 한 명이 아니라 내 가까운 친구들 생일을 죄다 메모해두고 있었다. 내 사람들까지 자기 사람으로 여기는 그 마음.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함께 사랑해주려는 그 태도. 나는 그 케이크 앞에서 결혼을 결심했다. 이 사람이라면, 내 세계 전체를 같이 안아줄 사람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날은 정말 심하게 싸웠다. 서로 목소리도 높였고, 결국 각자 방으로 들어가 문을 쾅 닫았다.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한참을 씩씩거렸다. 5분쯤 지났을까. 방문을 여는 소리도 없었는데, 문득 문틈 아래로 인기척이 느껴졌다. 문을 열어보니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우유 한 잔이 놓여 있었다. 화는 아직 하나도 안 풀렸는데, 이상하게 코끝이 시큰했다. 화는 났지만 사랑은 식지 않았다는 그 모순. 미운데 챙기고 싶은 그 마음. 연애란 결국 이런 거더라. 우유를 들고 다시 그 방문을 두드렸다.
솔직히 서운했다. 사귀는 동안 그 사람은 100일도, 1주년도, 단 한 번도 따로 챙긴 적이 없었다. 무심한 사람이라고 속으로 원망도 했다. 그러다 한번 마음먹고 따졌더니, 그 사람이 서랍에서 두꺼운 노트를 꺼내왔다. 펼쳐보니 우리가 만난 첫날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쓴 일기였다. 365일치가 빼곡했다. "매일이 기념일이라 따로 챙길 필요를 못 느꼈어." 변명이었다. 그런데 너무 좋은 변명이라 나는 그냥 졌다. 특별한 하루를 챙기는 대신 평범한 매일을 기록한 사람한테, 무슨 말로 더 따지겠는가. 그 노트를 끌어안고 한참을 울었다.
언젠가부터 처음 같은 설렘이 사라졌다. 손잡아도, 같이 있어도 가슴이 안 뛰었다. 아, 이게 권태기구나 싶어서 혼자 꽤 불안해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사람이 심하게 아파서 끙끙 앓았다. 그 모습을 보는데, 설렘과는 전혀 다른 무언가가 가슴 깊은 곳에서 솟구쳤다. 당장이라도 대신 아파주고 싶은, 더 묵직하고 절박한 감정이었다. 그때 깨달았다. 설렘이 사라진 게 아니라, 그 자리에 더 깊은 게 자리를 잡은 거였다. 안 떨려서 불안한 게 아니라, 너무 편해서 안 떨리는 거였다. 권태기는 거짓 신호였다.
동거 초반엔 그 사람 코 고는 소리 때문에 정말 잠을 못 잤다. 옆구리를 찌르고, 돌려 눕히고, 베개로 막아보고. 매일 밤이 전쟁이었다. 그런데 1년이 지난 지금은 정반대다. 출장 가서 그 사람이 옆에 없는 밤이면, 그 익숙한 소리가 없어서 오히려 잠이 안 온다. 너무 조용해서 뒤척인다. 사랑은 결국 단점을 백색소음으로 바꾸는 일이더라. 견딜 수 없던 소리가 어느새 가장 편안한 자장가가 됐다. 사람을 사랑하면, 그 사람의 결점까지 내 일상의 일부가 된다.
그 사람은 나보다 늘 먼저 출근한다. 그래서 매일 아침, 내가 일어나 부엌에 가면 냉장고에 포스트잇이 붙어 있다. 오늘은 "오늘도 네가 제일 예쁨"이라고 적혀 있었다. 어제는 "점심 거르지 마", 그저께는 그냥 하트 하나. 매일 다른 한마디가 비뚤배뚤한 글씨로 붙어 있다. 별것 아닌 메모 한 장인데, 나는 그거 하나로 하루를 버틴다. 회사에서 힘든 일이 있어도 아침에 본 그 한 줄을 떠올린다. 사랑은 거창한 이벤트가 아니라, 이런 사소한 매일에 있다는 걸 그 포스트잇이 가르쳐줬다.
요즘 우리 엄마는 나보다 그 사람을 더 챙긴다. 내가 전화하면 안부 첫마디가 "걔는 잘 있냐?"다. 정작 딸인 나는 뒷전이다. 반찬을 해도 "이건 걔 갖다줘라", 과일을 사도 "걔도 좀 챙겨라." 가끔은 내 편이어야 할 엄마를 통째로 뺏긴 기분이 들어서 살짝 서운하기도 하다. 그런데 그 서운함 끝엔 늘 안심이 남는다. 내 부모님이 저렇게 아끼는 사람이라면, 내가 보는 게 틀리지 않았다는 뜻이니까. 가족이 먼저 마음을 연 사람과 평생을 간다는 건, 생각보다 든든한 일이다.
몇 달 동안 그 사람 몰래 조금씩 모은 비상금이 있었다. 그런데 하필 그 봉투를 그 사람이 청소하다 발견하고 말았다.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숨긴 게 들켰으니 분명 서운해하거나 화낼 거라고 생각했다. 변명을 어떻게 할지 머리를 굴리는데, 그 사람이 봉투를 들고 환하게 웃었다. "오, 이걸로 우리 여행 가자!" 혼날 줄 알았던 일이 여행 계획이 됐다. 비밀이 들켰는데도 결국 화살이 '우리'를 향하는 사람. 어떤 상황에서도 나를 적이 아니라 같은 편으로 두는 사람이라, 나는 그날 또 한 번 안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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