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기지 않는 그날의 썰
10년 지기 베프가 드디어 결혼한다며 나를 부케 받을 사람으로 점찍었다. 들뜬 마음으로 결혼식장에 갔는데, 신랑 입장을 보는 순간 온몸이 굳었다. 신랑이, 내가 몇 년 전 진지하게 만났던 전 남자친구였다. 그리고 베프는 우리가 사귀었던 사실을 전혀 모른다. 우연히 시기가 안 겹쳤던 탓에, 둘은 서로 모르는 채로 만난 거였다. 나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축의금을 내고, 웃으며 단체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사진 찍는 내내 손이 덜덜 떨렸다. 이 비밀을 평생, 무덤까지 가져가기로 그날 결심했다. 베프의 가장 행복한 날을 망칠 권리는 나에게 없었다.
그날 오후, 그 사람은 나에게 헤어지자고 했다. 이유도 제대로 설명 안 해주고, 그냥 "마음이 식었어" 한마디였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울며 집에 왔다. 그날 저녁, 멍하니 카톡을 보다가 그 사람 프로필을 눌렀다. 그리고 무너졌다. 프사가 이미 다른 사람과 다정하게 찍은 커플 사진으로 바뀌어 있었다. 헤어진 지 몇 시간 만에. 그제야 모든 게 이해됐다. 그 이별 통보는 마음이 식어서가 아니라, 환승 준비가 다 끝났다는 신호였던 거다. 식은 게 아니라 이미 갈아탄 거였다. 나는 그 사실을, 헤어진 날 저녁 프사로 알았다.
큰맘 먹고 떠난 커플 여행이었다. 호텔 침대에 나란히 누워 있는데, 그 사람 폰 화면에 알림이 떴다. 무심코 봤다가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자기야ㅎㅎ"라는 저장명으로 온 메시지였다. 그 순간 내 머릿속을 스친 건 내 저장명이었다. 그 사람 폰에 나는 그냥 이름 석 자로 저장돼 있었다. '자기야'가 아니라.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화장실에 들어가, 떨리는 손으로 혼자 돌아가는 비행기 표를 끊었다. 다음 날 아침, 그 사람이 깨기 전에 짐을 챙겨 호텔을 나왔다. 여행은 거기서 끝났고, 우리도 끝났다.
두 달 동안 썸을 탔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사람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어떤 날은 한없이 다정하다가, 또 어떤 날은 나를 처음 보는 사람처럼 차갑게 굴었다. 변덕이 심한 사람인가 싶어 상처도 받고, 내가 뭘 잘못했나 자책도 했다. 그러다 우연히 그 사람 SNS에서 충격적인 사실을 알았다. 그 사람에겐 똑같이 생긴 일란성 쌍둥이가 있었다. 다정했던 날과 차가웠던 날, 나는 서로 다른 두 사람을 만나고 있었던 거다. 한 명인 줄 알았던 사람이 사실 두 명이었다. 두 달간의 그 종잡을 수 없던 감정의 정체가, 결국 쌍둥이의 함정이었다.
큰맘 먹고 새집으로 이사했다. 새 출발이라는 생각에 들떠 있었다. 그런데 이삿짐을 나르던 첫날, 옆집 문이 열리며 나온 사람을 보고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전 애인이었다. 그것도 헤어진 뒤 새로 만난 애인과 함께 살고 있었다. 하필이면 바로 옆집에. 세상이 이렇게 좁을 수가 있나 싶어 헛웃음이 나왔다. 그날 이후로 엘리베이터를 탈 때마다 심장이 쪼그라든다. 우연히 마주치면 둘 다 어색하게 층수만 쳐다본다. 새 출발 하려고 이사한 집에서, 매일 과거와 마주치며 산다. 이게 악몽이 아니면 뭘까.
새 애인 집에 처음 놀러 가는 날이었다. 우리 강아지도 함께 데려갔다. 그런데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강아지가 이상하게 굴었다. 처음 온 집인데도 전혀 낯설어하지 않았다. 오히려 익숙하게 거실 소파 밑을 뒤지고, 늘 가던 자리처럼 베란다로 달려가고, 특정 가구 냄새를 정확히 찾아 맡았다. 마치 예전에 살던 집처럼. 불길한 예감에 가구들을 다시 보니, 어딘가 낯이 익었다. 알고 보니 그 집은, 내 전 애인이 예전에 살던 바로 그 집이었다. 가구 몇 개가 그대로 남아 있었던 거다. 사람은 까맣게 몰랐는데, 강아지가 먼저 알아챘다.
오랜만에 소개팅에 나갔다. 카페에서 상대를 마주한 순간, 우리는 동시에 "어?" 하고 굳었다. 그 사람이 내 친동생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어색하게 시작했지만 대화가 잘 통했고, 결국 우리는 비밀리에 만나기 시작했다. 문제는 동생이 우리 사이를 전혀 모른다는 거였다. 누나가 자기 절친이랑 사귄다는 걸 알면 어떻게 될지 상상도 하기 싫었다. 그러다 명절에 그 사람이 동생을 보러 우리 집에 놀러 왔다. 거실에서 천연덕스럽게 동생이랑 게임하는 그 사람을 보는데, 밥이 도무지 목구멍으로 넘어가질 않았다. 식탁 밑에선 발이 닿아 있었다.
오랜만에 옛날 사진들을 정리하다가, 10년 전 대학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단체 사진을 꺼냈다. 추억에 잠겨 한 명 한 명 얼굴을 훑어보던 중이었다. 그러다 사진 한쪽 구석에서 손이 멈췄다. 지금 내 애인과, 내 가장 친한 친구가 나란히 서서 손을 잡고 있었다. 둘 다 "우린 그냥 아는 사이야"라고 했었는데, 사진 속 두 사람은 누가 봐도 연인 사이였다. 10년 동안 둘 다 모른 척 묻어둔 과거가, 빛바랜 사진 한 장으로 한순간에 드러났다. 나는 그 사진을 들고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어떻게 물어봐야 할지, 아니 물어봐도 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결혼식이 끝나고, 신혼여행 가기 전에 방명록을 정리하다가 묘한 걸 발견했다. 신랑 측 친구 한 명과 내 친구 한 명이, 같은 페이지에 똑같은 문구를 남겨놨다. "오빠 또 봐요♡" 처음엔 그냥 우연이려니 했다. 그런데 필체와 표현이 이상하게 닮아 있었고, 곰곰이 따져보니 그 두 하객이 같은 사람의 '그 시절 애인'들이었다. 양쪽 다 모른 채 한 결혼식에 와 있던 거다. 내 결혼식이 졸지에 누군가의 양다리 현장 검증장이 됐다. 방명록 한 장이 몇 년 묵은 비밀을 들춰낸 셈이었다. 나는 그 페이지를 조용히 사진으로만 남겨뒀다. 차마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친구 결혼식에 하객으로 갔다. 주례 선생님이 단상에 오르는데, 신부 표정이 미묘하게 흔들리는 걸 봤다. 알고 보니 그 주례 선생님은, 신부가 학창 시절 오래 짝사랑했던 바로 그 선배였다. 주례사가 시작되자 분위기가 점점 이상해졌다. 선생님은 "신부는 참 한결같은 사람"이라며, 묘하게 의미심장한 말들을 늘어놓았다. 신부 얼굴은 빨갰고, 신랑 표정은 점점 굳어갔다. 하객석에 앉은 우리 모두가 그 미묘한 기류를 느꼈다. 축하의 자리가 어느새 한 편의 다큐멘터리가 됐다. 그날 결혼식 사진보다, 굳어가던 신랑 얼굴이 더 오래 기억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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