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기지 않는 그날의 썰
10년 지기 베프가 드디어 결혼한다며 나를 부케 받을 사람으로 점찍었다. 들뜬 마음으로 결혼식장에 갔는데, 신랑 입장을 보는 순간 온몸이 굳었다. 신랑이, 내가 몇 년 전 진지하게 만났던 전 남자친구였다. 그리고 베프는 우리가 사귀었던 사실을 전혀 모른다. 우연히 시기가 안 겹쳤던 탓에, 둘은 서로 모르는 채로 만난 거였다. 나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축의금을 내고, 웃으며 단체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사진 찍는 내내 손이 덜덜 떨렸다. 이 비밀을 평생, 무덤까지 가져가기로 그날 결심했다. 베프의 가장 행복한 날을 망칠 권리는 나에게 없었다.
큰맘 먹고 떠난 커플 여행이었다. 호텔 침대에 나란히 누워 있는데, 그 사람 폰 화면에 알림이 떴다. 무심코 봤다가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자기야ㅎㅎ"라는 저장명으로 온 메시지였다. 그 순간 내 머릿속을 스친 건 내 저장명이었다. 그 사람 폰에 나는 그냥 이름 석 자로 저장돼 있었다. '자기야'가 아니라.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화장실에 들어가, 떨리는 손으로 혼자 돌아가는 비행기 표를 끊었다. 다음 날 아침, 그 사람이 깨기 전에 짐을 챙겨 호텔을 나왔다. 여행은 거기서 끝났고, 우리도 끝났다.
그날 애인이랑 크게 다퉜다. 화가 나서 친구한테 험담을 쏟아부었다. "걔 진짜 이기적이야, 어제는 또…" 한참을 타이핑해서 전송 버튼을 눌렀다. 그런데 보내고 나서 채팅방 이름을 본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친구한테 보낸다는 게, 회사 전체 팀 단톡방이었다. 50명이 있는 그곳에. 심지어 그 메시지 끝엔 팀장님 험담까지 풀세트로 붙어 있었다. 손이 덜덜 떨렸다. 황급히 삭제했지만 이미 숫자는 줄어들고 있었다. 그날 나는 연애도, 회사도 한꺼번에 잃을 뻔했다. 그날 이후로 메시지 보내기 전엔 채팅방 이름부터 세 번 확인한다.
그날 오후, 그 사람은 나에게 헤어지자고 했다. 이유도 제대로 설명 안 해주고, 그냥 "마음이 식었어" 한마디였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울며 집에 왔다. 그날 저녁, 멍하니 카톡을 보다가 그 사람 프로필을 눌렀다. 그리고 무너졌다. 프사가 이미 다른 사람과 다정하게 찍은 커플 사진으로 바뀌어 있었다. 헤어진 지 몇 시간 만에. 그제야 모든 게 이해됐다. 그 이별 통보는 마음이 식어서가 아니라, 환승 준비가 다 끝났다는 신호였던 거다. 식은 게 아니라 이미 갈아탄 거였다. 나는 그 사실을, 헤어진 날 저녁 프사로 알았다.
큰맘 먹고 새집으로 이사했다. 새 출발이라는 생각에 들떠 있었다. 그런데 이삿짐을 나르던 첫날, 옆집 문이 열리며 나온 사람을 보고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전 애인이었다. 그것도 헤어진 뒤 새로 만난 애인과 함께 살고 있었다. 하필이면 바로 옆집에. 세상이 이렇게 좁을 수가 있나 싶어 헛웃음이 나왔다. 그날 이후로 엘리베이터를 탈 때마다 심장이 쪼그라든다. 우연히 마주치면 둘 다 어색하게 층수만 쳐다본다. 새 출발 하려고 이사한 집에서, 매일 과거와 마주치며 산다. 이게 악몽이 아니면 뭘까.
오랜만에 소개팅에 나갔다. 카페에서 상대를 마주한 순간, 우리는 동시에 "어?" 하고 굳었다. 그 사람이 내 친동생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어색하게 시작했지만 대화가 잘 통했고, 결국 우리는 비밀리에 만나기 시작했다. 문제는 동생이 우리 사이를 전혀 모른다는 거였다. 누나가 자기 절친이랑 사귄다는 걸 알면 어떻게 될지 상상도 하기 싫었다. 그러다 명절에 그 사람이 동생을 보러 우리 집에 놀러 왔다. 거실에서 천연덕스럽게 동생이랑 게임하는 그 사람을 보는데, 밥이 도무지 목구멍으로 넘어가질 않았다. 식탁 밑에선 발이 닿아 있었다.
새 애인 집에 처음 놀러 가는 날이었다. 우리 강아지도 함께 데려갔다. 그런데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강아지가 이상하게 굴었다. 처음 온 집인데도 전혀 낯설어하지 않았다. 오히려 익숙하게 거실 소파 밑을 뒤지고, 늘 가던 자리처럼 베란다로 달려가고, 특정 가구 냄새를 정확히 찾아 맡았다. 마치 예전에 살던 집처럼. 불길한 예감에 가구들을 다시 보니, 어딘가 낯이 익었다. 알고 보니 그 집은, 내 전 애인이 예전에 살던 바로 그 집이었다. 가구 몇 개가 그대로 남아 있었던 거다. 사람은 까맣게 몰랐는데, 강아지가 먼저 알아챘다.
결혼식이 끝나고, 신혼여행 가기 전에 방명록을 정리하다가 묘한 걸 발견했다. 신랑 측 친구 한 명과 내 친구 한 명이, 같은 페이지에 똑같은 문구를 남겨놨다. "오빠 또 봐요♡" 처음엔 그냥 우연이려니 했다. 그런데 필체와 표현이 이상하게 닮아 있었고, 곰곰이 따져보니 그 두 하객이 같은 사람의 '그 시절 애인'들이었다. 양쪽 다 모른 채 한 결혼식에 와 있던 거다. 내 결혼식이 졸지에 누군가의 양다리 현장 검증장이 됐다. 방명록 한 장이 몇 년 묵은 비밀을 들춰낸 셈이었다. 나는 그 페이지를 조용히 사진으로만 남겨뒀다. 차마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오랜만에 옛날 사진들을 정리하다가, 10년 전 대학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단체 사진을 꺼냈다. 추억에 잠겨 한 명 한 명 얼굴을 훑어보던 중이었다. 그러다 사진 한쪽 구석에서 손이 멈췄다. 지금 내 애인과, 내 가장 친한 친구가 나란히 서서 손을 잡고 있었다. 둘 다 "우린 그냥 아는 사이야"라고 했었는데, 사진 속 두 사람은 누가 봐도 연인 사이였다. 10년 동안 둘 다 모른 척 묻어둔 과거가, 빛바랜 사진 한 장으로 한순간에 드러났다. 나는 그 사진을 들고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어떻게 물어봐야 할지, 아니 물어봐도 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친구 결혼식에 하객으로 갔다. 주례 선생님이 단상에 오르는데, 신부 표정이 미묘하게 흔들리는 걸 봤다. 알고 보니 그 주례 선생님은, 신부가 학창 시절 오래 짝사랑했던 바로 그 선배였다. 주례사가 시작되자 분위기가 점점 이상해졌다. 선생님은 "신부는 참 한결같은 사람"이라며, 묘하게 의미심장한 말들을 늘어놓았다. 신부 얼굴은 빨갰고, 신랑 표정은 점점 굳어갔다. 하객석에 앉은 우리 모두가 그 미묘한 기류를 느꼈다. 축하의 자리가 어느새 한 편의 다큐멘터리가 됐다. 그날 결혼식 사진보다, 굳어가던 신랑 얼굴이 더 오래 기억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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