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불문 연애 잡썰
어느 날 저녁, 모르는 번호로 문자 한 통이 왔다. "잘 지내?" 짧은 세 글자. 누구지 싶어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번호 끝자리를 보고 심장이 내려앉았다. 번호를 바꾼 전 애인이었다. 헤어진 지 5년 만이었다. 새 번호로 굳이 나에게 안부를 물어온 거다. 손가락이 키패드 위에서 한참을 머뭇거렸다. 답을 할까, 말까. 5년 동안 묻어둔 감정들이 한꺼번에 올라왔다. 결국 나는 답장을 쓰지 않고, 조용히 폰을 덮었다. 어떤 문은 다시 열면 안 된다는 걸, 그 5년의 시간이 가르쳐줬다. 잘 지내냐는 그 한마디에 흔들렸지만, 흔들림에 응하지 않는 것도 사랑이 남긴 교훈이었다. 그 문은 닫아두기로 했다.
큰맘 먹고 소개팅 앱을 깔았다. 이런저런 프로필을 넘기다가, 한 사람과 매칭이 됐다는 알림이 떴다. 두근거리며 프로필을 자세히 들여다보다가 얼어붙었다. 바로 우리 회사 옆 팀 사람이었다. 매일 복도에서 마주치는, 어색하게 인사만 하던 그 사람. 화면 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알아봤고, 거의 동시에 황급히 앱을 삭제했다. 본 적 없는 일로 하자는 무언의 합의였다. 문제는 다음 날이었다. 회의실에서 마주친 우리는, 서로 그 앱을 봤다는 걸 알면서도 천연덕스럽게 모른 척해야 했다. 눈도 못 마주치고 회의 내내 자료만 봤다. 세상이 이렇게 좁을 줄이야. 그날 나는 모른 척하느라 죽는 줄 알았다.
친구가 요즘 만나는 남자 때문에 힘들다며 상담을 청했다. 카페에서 마주 앉아, 나는 진지하게 친구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었다. 친구는 그 '나쁜 남자'의 만행을 줄줄이 늘어놨다. 그런데 듣다 보니 이상하게 익숙했다. 그 사람의 말버릇, 데이트 패턴, 잘 가는 식당까지. 점점 불길해지던 차에, 친구가 그 사람 사진을 보여줬다. 내 전 애인이었다. 세상이 진짜 좁다는 걸 그 순간 온몸으로 느꼈다. 나는 차마 "걔 내 전 남친이야"라는 말을 꺼낼 수 없었다. 그냥 입을 다물고, 친구를 위로하는 데만 집중했다. 어떤 진실은 모르는 게 더 나을 때도 있다. 그날 나는 끝까지 비밀을 지켰다.
엄마 집 정리를 돕다가, 오래된 상자 속에서 빛바랜 일기장 한 권을 발견했다. 호기심에 몰래 펼쳐봤다가, 뜻밖의 세계를 마주했다. 아빠를 만나기 한참 전, 엄마가 짝사랑했던 어떤 사람 이야기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그 사람이 웃으면 하루가 행복했다는 둥, 답장을 기다리며 밤을 새웠다는 둥. 지금의 무뚝뚝한 엄마와는 전혀 다른, 풋풋한 소녀의 글씨였다. 엄마도 누군가를 애타게 짝사랑하던 시절이 있었구나. 부모님도 한때는 연애 세포가 폭발하던 청춘이었다. 그 사실이 어쩐지 뭉클했다. 나는 일기장을 조용히 제자리에 두고, 그날 저녁 엄마 손을 한 번 더 꼭 잡아봤다.
도무지 그 사람 마음을 모르겠어서, 답답한 마음에 AI에게 물어봤다. "이 사람이 날 좋아하는 걸까요?" 하고,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구구절절 입력했다. AI의 대답은 명쾌했다. "가장 정확한 방법은 직접 물어보는 것입니다."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너무 맞는 말이라서. 온갖 데이터를 분석해줄 거라 기대했는데, AI는 가장 단순하고 본질적인 답을 줬다. 맞다. 직접 물어보면 된다. 그런데 그게 세상에서 제일 어렵다. 거절이 두렵고, 관계가 깨질까 무서워서. 기계도 아는 그 간단한 진리를, 나만 실행에 옮기지 못한다. AI 앞에서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정곡을 찔린 채로.
그 사람에게 고백을 받은 날이었다.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기분이 좋아서, 집에 오는 길에 충동적으로 로또 한 장을 샀다. 오늘 같은 날엔 왠지 운이 좋을 것 같았다. 며칠 뒤 당첨 번호를 맞춰보니, 정말로 5등에 당첨됐다. 당첨금은 5천 원. 소소하지만 그래도 신기해서 그 사람한테 자랑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능청스럽게 받아쳤다. "에이, 5등이 무슨 대수야. 나 만난 게 1등이지." 오글거려서 "아 진짜 왜 그래" 하고 핀잔을 줬지만, 솔직히 그날 밤 그 말이 자꾸 떠올라서 잠이 안 왔다. 5천 원짜리 당첨보다, 그 한마디가 훨씬 더 큰 행운처럼 느껴졌다. 오글거리는 말도, 그 사람이 하면 다르다.
1년 가까이 혼밥하러 다니던 동네 식당이 있다. 사장님은 늘 말없이 밥을 차려주셨고, 나는 구석 자리에서 조용히 끼니를 때우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로 사귄 애인을 데리고 그 식당에 갔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사장님이 우리를 보더니 활짝 웃으며 외쳤다. "오늘은 둘이 왔네!" 그러고는 묻지도 않은 서비스 반찬을 한 상 가득 내주셨다. 1년간 혼자 오던 손님이 애인을 데려온 걸, 사장님은 마치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나도 모르게 코끝이 찡했다. 정이란 게 이런 거구나 싶었다. 그날 그 식당의 밥은, 어떤 고급 레스토랑보다 따뜻했다.
헤어진 지 한참 됐고, 이제 좀 잊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유튜브를 켰는데 추천 영상에 전 애인이 그렇게 좋아하던 노래가 떡하니 떠 있었다. 순간 멈칫했다. 내가 검색한 적도 없는 곡인데. 알고 보니 우리가 같이 보던 영상들, 같이 듣던 노래들을 알고리즘이 전부 기억하고 있었던 거다. 내가 애써 지우려는 흔적을, 기계는 데이터로 차곡차곡 쌓아두고 있었다. 잊으려고 발버둥 치는 나보다, 알고리즘이 훨씬 더 끈질겼다. 마음에서 지운다고 다 지워지는 게 아니었다. 추천 목록 속에 그 사람이 불쑥불쑥 살아 돌아온다. 결국 나는 그 노래를 한참 동안 들었다.
헤어진 뒤, 집안 곳곳에 남은 커플템들이 자꾸 눈에 밟혔다. 그중에서도 커플링이 제일 마음을 아프게 했다. 결국 마음을 정리하기로 하고 중고 거래 앱에 올렸다. 금방 사겠다는 사람이 나타났다. 만나서 반지를 건네는데, 그 사람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여자친구랑 커플링으로 쓰려고요. 디자인이 너무 예뻐요!" 우리가 사랑을 약속하며 맞췄던 그 반지가, 이제 다른 커플의 시작이 되는 순간이었다. 묘한 기분이었다. 우리의 끝이 누군가의 시작이 됐다. 슬프면서도, 한편으론 그 반지가 다시 사랑받게 된다는 게 위로가 됐다. 사랑은 끝나도, 사랑의 흔적은 또 다른 사랑으로 순환하는 모양이다.
무려 3년간 모태솔로, 아니 연애 세포가 완전히 죽은 줄 알았던 나였다. 누구를 봐도 설레지 않았고, 그냥 연애는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런데 어느 날, 자주 가던 카페에서 사장님이 나를 보고 "○○ 님, 오늘도 아메리카노 맞으시죠?" 하고 내 이름을 불러줬다. 단골 손님 이름을 외워준 것뿐인데, 그 순간 죽었던 줄 알았던 가슴이 쿵 하고 뛰었다. 물론 사장님한테 반한 건 아니다. 그저 작은 친절 하나에 이렇게 설렐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내 연애 세포는 죽은 게 아니라 잠들어 있었던 거다. 작은 다정함 하나에도 깨어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거다. 나, 아직 살아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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