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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오후, 그 사람은 나에게 헤어지자고 했다. 이유도 제대로 설명 안 해주고, 그냥 "마음이 식었어" 한마디였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울며 집에 왔다. 그날 저녁, 멍하니 카톡을 보다가 그 사람 프로필을 눌렀다. 그리고 무너졌다. 프사가 이미 다른 사람과 다정하게 찍은 커플 사진으로 바뀌어 있었다. 헤어진 지 몇 시간 만에. 그제야 모든 게 이해됐다. 그 이별 통보는 마음이 식어서가 아니라, 환승 준비가 다 끝났다는 신호였던 거다. 식은 게 아니라 이미 갈아탄 거였다. 나는 그 사실을, 헤어진 날 저녁 프사로 알았다.
3년 만이었다.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다 우연히 마주쳤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둘 다 어색하게 "어… 안녕" 정도만 하고 각자 길을 갔다. 그렇게 스쳐 지나 10미터쯤 걸었을까. 무언가에 이끌리듯 뒤를 돌아봤다. 그 순간, 그 사람도 정확히 같은 타이밍에 뒤를 돌아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고,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피식 웃었다. 아무 말도 더 하지 않았다. 그냥 그렇게 웃고는 각자 가던 길을 갔다. 끝난 사랑도 가끔은 이렇게 인사를 한다. 미련도 후회도 아닌, 한때 서로의 전부였던 사람에게 보내는 마지막 안부 같은 것이었다.
1년 만에 다시 만났다. 카페에 마주 앉아 한참을 어색하게 서로 눈치만 봤다.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몰라 손에 든 컵만 만지작거렸다. 그러다 그 사람이 먼저 입을 뗐다. "밥은… 먹었어?" 그 흔하고 평범한 한마디에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헤어질 때 우리가 끝내 못 했던, 가장 사소하고 다정한 말이었다. 그제야 알았다. 우리가 헤어진 이유는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이런 말을 제때 못 한 표현의 부족 때문이었다는 걸. 밥 먹었냐는 그 한마디면 됐을 텐데. 우리는 그걸 1년이나 돌아 다시 마주 앉아서야 겨우 했다.
썸 타는 사람한테 어떻게 답장할지 도무지 감이 안 와서, 친구한테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그 사람이 보낸 톡을 캡처하고, 내가 쓰려는 답장 초안을 적어서 "이렇게 답장하면 돼?" 하고 친구에게 보냈다. 아니, 보냈다고 생각했다. 전송하고 0.5초 뒤에 채팅방 이름을 보고 피가 식었다. 친구가 아니라, 바로 그 사람한테 보낸 거였다. "이렇게 답장하면 돼?"라는 그 메타적인 문장 그대로. 그 사람은 자기한테 보낼 답장을 자기한테 검수받은 셈이 됐다. 황급히 삭제했지만 이미 읽혔다. 나는 한동안 그 사람 얼굴을 못 봤다. 답장 하나 보내려다, 답장 연습하는 모습까지 다 들켜버린 대참사였다.
밤늦게 톡이 왔다. "내일 시간 돼?" 무슨 일 있나 싶어서 "왜? 무슨 일 있어?" 하고 물었다. 잠깐의 침묵 뒤에 답이 왔다. "그냥, 너 보려고." 이유도 핑계도 없이, 그냥 보고 싶다는 말. 나는 그 문장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특별한 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보고 싶다는 말은, 썸의 마지막 관문 같은 거다. 그 문턱을 넘으면 더 이상 핑계가 필요 없어진다. 다음 날 우리는 만났고, 그리고 사귀었다. 이유 없이 보고 싶다는 그 한마디가 시작이었다.
비 예보가 있던 날, 그 사람이 가방에서 우산을 두 개나 꺼냈다. "너 우산 없을 것 같아서 하나 더 챙겼어. 이거 너 줄게." 준비성 좋다고 생각하며 고맙게 받았다. 그런데 막상 헤어질 시간이 되어 비가 쏟아지자, 그 사람은 자기 우산 하나만 펴고 "같이 쓰자" 했다. 내가 받은 우산은 펴지도 않았다. 역까지 걷는 내내, 가방 속에 멀쩡한 우산 두 번째가 들어 있었다. 처음부터 하나는 핑계였던 거다. 같이 쓰려고, 어깨 닿는 거리를 만들려고. 그 치밀한 다정함을 눈치챈 순간, 나는 이게 더 이상 썸이 아니라는 걸 확신했다.
이별한 그날, 나는 택시 뒷자리에서 펑펑 울고 있었다. 창밖을 보며 소리 죽여 흐느끼는데, 백미러로 그 모습을 본 기사님이 조용히 말을 건넸다. "손님, 너무 슬퍼 마요. 사람은 버스 같은 거예요. 하나 놓쳐도 조금 기다리면 또 와요." 그 투박하고 진부한 위로에, 나는 더 크게 울어버렸다. 어쩐지 그 말이 정확히 내 마음을 두드렸다. 위로는 늘 의외의 곳에서 온다. 가까운 친구의 백 마디 말보다, 처음 본 택시 기사님의 한마디가 그날 나를 살렸다. 목적지에 내릴 즈음엔 눈물도 어느 정도 그쳐 있었다. 나는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하며, 그 명언을 마음에 새겼다.
사내연애를 시작하면서 우리는 한 가지 약속을 했다. "둘 중 하나가 회사를 떠나면, 그때 당당하게 공개하자." 그때까진 철저히 비밀로 하기로. 그런데 막상 내가 이직이 확정되어 그날이 다가오니, 이상하게 공개가 망설여졌다. 떳떳하게 손잡고 다닐 수 있게 됐는데도 어쩐지 두려웠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어쩌면 우리는 '비밀'이라는 양념 때문에 더 두근거렸던 건 아닐까 싶었다. 들킬까 조마조마하던 그 스릴, 몰래 주고받던 눈빛. 그게 사라지면 우리도 평범해질까 봐. 공개를 앞두고 나는 괜히 복잡한 마음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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