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사랑부터 환승까지. 매일 새로 올라오는 연애 이야기를 읽고, 공감하고, 내 썰도 풀어보세요.
3년을 만난 사람과 헤어졌다. 길었던 시간에 비하면 끝은 너무 간단했다. 마지막으로 주고받은 톡은 딱 세 글자, "잘 지내"였다. 그 짧은 말이 이렇게까지 잔인할 줄은 몰랐다. 잘 지내라니. 나는 지금 하나도 잘 못 지내고 있는데, 밥도 못 넘기고 밤마다 그 사람 생각에 잠도 못 자는데. 잘 지내라는 그 다정한 말이, 사실은 '이제 너 없이도 잘 살아라'는 통보처럼 들렸다. 나는 그 세 글자를 지우지도 못하고, 답하지도 못한 채 오늘도 톡창을 열었다 닫았다 한다. 잘 지내라는 말이 가장 잔인한 작별이 될 수 있다는 걸, 그때 알았다.
썸의 절정, 처음으로 손을 잡은 그 로맨틱한 순간이었다. 손끝이 닿고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분위기가 완벽했다. 바로 그때, 긴장이 풀렸는지 내 몸에서 소리가 났다. 그것도 아주 크게. 정적이 흘렀다. 세상이 멈춘 것 같았다. 손을 잡은 채로 굳어버린 나는, 그대로 땅이 꺼져 사라지고 싶었다. 분위기고 뭐고 다 망쳤다는 절망이 밀려왔다. 그런데 그 사람이 잠깐 멈칫하더니, 씩 웃으며 말했다. "사실 나도 아까부터 참고 있었어." 그러고는 정말로 같이 뀌었다. 우리는 손을 잡은 채 한참을 깔깔 웃었다. 그 민망한 순간에, 우리는 오히려 가장 편한 사이가 됐다. 진짜 인연은 그렇게 시작된다.
친구 결혼식에 하객으로 갔다. 주례 선생님이 단상에 오르는데, 신부 표정이 미묘하게 흔들리는 걸 봤다. 알고 보니 그 주례 선생님은, 신부가 학창 시절 오래 짝사랑했던 바로 그 선배였다. 주례사가 시작되자 분위기가 점점 이상해졌다. 선생님은 "신부는 참 한결같은 사람"이라며, 묘하게 의미심장한 말들을 늘어놓았다. 신부 얼굴은 빨갰고, 신랑 표정은 점점 굳어갔다. 하객석에 앉은 우리 모두가 그 미묘한 기류를 느꼈다. 축하의 자리가 어느새 한 편의 다큐멘터리가 됐다. 그날 결혼식 사진보다, 굳어가던 신랑 얼굴이 더 오래 기억에 남았다.
솔직히 서운했다. 사귀는 동안 그 사람은 100일도, 1주년도, 단 한 번도 따로 챙긴 적이 없었다. 무심한 사람이라고 속으로 원망도 했다. 그러다 한번 마음먹고 따졌더니, 그 사람이 서랍에서 두꺼운 노트를 꺼내왔다. 펼쳐보니 우리가 만난 첫날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쓴 일기였다. 365일치가 빼곡했다. "매일이 기념일이라 따로 챙길 필요를 못 느꼈어." 변명이었다. 그런데 너무 좋은 변명이라 나는 그냥 졌다. 특별한 하루를 챙기는 대신 평범한 매일을 기록한 사람한테, 무슨 말로 더 따지겠는가. 그 노트를 끌어안고 한참을 울었다.
소개팅 상대 얼굴을 마주 보기가 어쩐지 부끄러웠다. 그래서 메뉴판을 펼쳐 든 채, 그 너머로 슬쩍 상대 얼굴을 훔쳐봤다. 들키지 않게 조심조심. 그런데 메뉴판 위로 시선을 살짝 올린 순간, 상대도 똑같이 메뉴판으로 얼굴을 반쯤 가린 채 나를 훔쳐보고 있었다. 메뉴판 너머로 눈이 정통으로 마주쳤다. 둘 다 화들짝 놀라서, 약속이라도 한 듯 메뉴판을 더 높이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메뉴판 뒤에서 각자 혼자 웃었다. 음식은 한참 뒤에야 시켰다. 그 어설프고 수줍은 눈맞춤이, 우리 첫 만남의 가장 선명한 장면이 됐다.
그 사람에게 고백을 받은 날이었다.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기분이 좋아서, 집에 오는 길에 충동적으로 로또 한 장을 샀다. 오늘 같은 날엔 왠지 운이 좋을 것 같았다. 며칠 뒤 당첨 번호를 맞춰보니, 정말로 5등에 당첨됐다. 당첨금은 5천 원. 소소하지만 그래도 신기해서 그 사람한테 자랑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능청스럽게 받아쳤다. "에이, 5등이 무슨 대수야. 나 만난 게 1등이지." 오글거려서 "아 진짜 왜 그래" 하고 핀잔을 줬지만, 솔직히 그날 밤 그 말이 자꾸 떠올라서 잠이 안 왔다. 5천 원짜리 당첨보다, 그 한마디가 훨씬 더 큰 행운처럼 느껴졌다. 오글거리는 말도, 그 사람이 하면 다르다.
모임이 늦게 끝난 밤, 우리 집은 동쪽이고 그 사람 집은 정반대 서쪽이었다. 그런데도 자연스럽게 "데려다줄게" 하고 택시에 같이 탔다. 나를 먼저 내려준 다음, 그 사람은 거기서 다시 한참을 돌아가야 했다. 요금이 두 배는 더 나왔을 거다. 미터기 올라가는 걸 분명 봤을 텐데도 끝까지 "괜찮아" 했다. 나는 그 마음을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 "진짜 고마워, 조심히 들어가" 정도로만. 손해 보는 걸 알면서 돌아가는 사람과, 그 손해를 모른 척 받아주는 사람. 이 묘한 거리감이 썸의 정치학이다.
매일 저녁 7시, 헬스장에서 마주치는 사람이 있다. 말은 한마디도 안 해봤다. 그냥 거울 너머로 가끔 눈이 스칠 뿐이다. 오늘은 늘 쓰던 덤벨이 안 보여서 한참 두리번거렸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말없이 자기 옆에 있던 덤벨 하나를 슥 밀어줬다. 고맙다고 할 새도 없이 다시 자기 운동을 했다. 운동 끝나고 가방 챙기는데, 정수기 옆에 이온음료 한 병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이름표도 메모도 없었다. 누가 봐도 내 거 같은데, 또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 병을 들까 말까 5분을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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