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사랑부터 환승까지. 매일 새로 올라오는 연애 이야기를 읽고, 공감하고, 내 썰도 풀어보세요.
한 달 만의 만남이었다. 입국장 게이트 앞에서, 나는 발을 동동 구르며 그 사람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비행기가 도착했다는 안내가 뜨고도 한참, 사람들이 줄지어 나왔다. 드디어 게이트가 열리고 익숙한 얼굴이 보인 순간, 나는 캐리어고 뭐고 다 제치고 달려가 그 사람을 끌어안았다. 게이트 열림부터 품에 안기기까지, 길어야 3분. 그 3분을 위해 우리는 30일을 버텼다. 매일 밤 영상통화로, 손편지로, 시차를 넘나들며. 거리는 만남을 더 진하게 만든다. 늘 곁에 있었다면 절대 느끼지 못했을, 그 품의 온기와 안도감. 공항은 우리에게 가장 뜨거운 장소다.
어느 날 저녁, 모르는 번호로 문자 한 통이 왔다. "잘 지내?" 짧은 세 글자. 누구지 싶어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번호 끝자리를 보고 심장이 내려앉았다. 번호를 바꾼 전 애인이었다. 헤어진 지 5년 만이었다. 새 번호로 굳이 나에게 안부를 물어온 거다. 손가락이 키패드 위에서 한참을 머뭇거렸다. 답을 할까, 말까. 5년 동안 묻어둔 감정들이 한꺼번에 올라왔다. 결국 나는 답장을 쓰지 않고, 조용히 폰을 덮었다. 어떤 문은 다시 열면 안 된다는 걸, 그 5년의 시간이 가르쳐줬다. 잘 지내냐는 그 한마디에 흔들렸지만, 흔들림에 응하지 않는 것도 사랑이 남긴 교훈이었다. 그 문은 닫아두기로 했다.
큰맘 먹고 새집으로 이사했다. 새 출발이라는 생각에 들떠 있었다. 그런데 이삿짐을 나르던 첫날, 옆집 문이 열리며 나온 사람을 보고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전 애인이었다. 그것도 헤어진 뒤 새로 만난 애인과 함께 살고 있었다. 하필이면 바로 옆집에. 세상이 이렇게 좁을 수가 있나 싶어 헛웃음이 나왔다. 그날 이후로 엘리베이터를 탈 때마다 심장이 쪼그라든다. 우연히 마주치면 둘 다 어색하게 층수만 쳐다본다. 새 출발 하려고 이사한 집에서, 매일 과거와 마주치며 산다. 이게 악몽이 아니면 뭘까.
썸의 절정, 처음으로 손을 잡은 그 로맨틱한 순간이었다. 손끝이 닿고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분위기가 완벽했다. 바로 그때, 긴장이 풀렸는지 내 몸에서 소리가 났다. 그것도 아주 크게. 정적이 흘렀다. 세상이 멈춘 것 같았다. 손을 잡은 채로 굳어버린 나는, 그대로 땅이 꺼져 사라지고 싶었다. 분위기고 뭐고 다 망쳤다는 절망이 밀려왔다. 그런데 그 사람이 잠깐 멈칫하더니, 씩 웃으며 말했다. "사실 나도 아까부터 참고 있었어." 그러고는 정말로 같이 뀌었다. 우리는 손을 잡은 채 한참을 깔깔 웃었다. 그 민망한 순간에, 우리는 오히려 가장 편한 사이가 됐다. 진짜 인연은 그렇게 시작된다.
헤어진 지 한참 지나 까맣게 잊고 있던 일이었다. 예전에 그 사람 집으로 주문해둔 택배가, 받는 사람이 없다며 며칠을 떠돌다 결국 나에게 반송됐다. 무심코 송장을 보다가 멈칫했다. 받는 사람 이름에 아직도 내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 사람이 자기 집 주소의 수령인을 아직도 내 이름으로 둔 거다. 헤어진 지가 언제인데. 주소를 못 바꾼 건지, 아니면 일부러 안 바꾼 건지. 그게 무심함인지 미련인지, 나는 그 사람에게 묻고 싶었다. 하지만 끝내 묻지 못했다. 그 택배 상자를 들고 한참을 현관에 서 있었다.
분명 "그냥 친구로 밥이나 먹자"고 만난 자리였다. 그런데 메뉴가 나오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연스럽게 접시를 나눠 먹기 시작했다. 결정적인 건 새우였다. 그 사람이 아무렇지 않게 새우 껍질을 까서 내 앞접시에 슥 올려놨다. 손에 양념 묻혀가며, 한 마리도 아니고 계속. 나는 젓가락을 멈추고 생각했다. 친구한테 새우 까서 접시에 올려주는 사람을, 살면서 본 적이 있던가? 나는 못 봤다. 우리는 분명 친구로 만났는데, 이 자리는 친구의 자리가 아니었다.
헤어진 지 한참 됐고, 이제 좀 잊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유튜브를 켰는데 추천 영상에 전 애인이 그렇게 좋아하던 노래가 떡하니 떠 있었다. 순간 멈칫했다. 내가 검색한 적도 없는 곡인데. 알고 보니 우리가 같이 보던 영상들, 같이 듣던 노래들을 알고리즘이 전부 기억하고 있었던 거다. 내가 애써 지우려는 흔적을, 기계는 데이터로 차곡차곡 쌓아두고 있었다. 잊으려고 발버둥 치는 나보다, 알고리즘이 훨씬 더 끈질겼다. 마음에서 지운다고 다 지워지는 게 아니었다. 추천 목록 속에 그 사람이 불쑥불쑥 살아 돌아온다. 결국 나는 그 노래를 한참 동안 들었다.
사내연애를 시작하면서 우리는 한 가지 약속을 했다. "둘 중 하나가 회사를 떠나면, 그때 당당하게 공개하자." 그때까진 철저히 비밀로 하기로. 그런데 막상 내가 이직이 확정되어 그날이 다가오니, 이상하게 공개가 망설여졌다. 떳떳하게 손잡고 다닐 수 있게 됐는데도 어쩐지 두려웠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어쩌면 우리는 '비밀'이라는 양념 때문에 더 두근거렸던 건 아닐까 싶었다. 들킬까 조마조마하던 그 스릴, 몰래 주고받던 눈빛. 그게 사라지면 우리도 평범해질까 봐. 공개를 앞두고 나는 괜히 복잡한 마음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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