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사랑부터 환승까지. 매일 새로 올라오는 연애 이야기를 읽고, 공감하고, 내 썰도 풀어보세요.
그날 오후, 그 사람은 나에게 헤어지자고 했다. 이유도 제대로 설명 안 해주고, 그냥 "마음이 식었어" 한마디였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울며 집에 왔다. 그날 저녁, 멍하니 카톡을 보다가 그 사람 프로필을 눌렀다. 그리고 무너졌다. 프사가 이미 다른 사람과 다정하게 찍은 커플 사진으로 바뀌어 있었다. 헤어진 지 몇 시간 만에. 그제야 모든 게 이해됐다. 그 이별 통보는 마음이 식어서가 아니라, 환승 준비가 다 끝났다는 신호였던 거다. 식은 게 아니라 이미 갈아탄 거였다. 나는 그 사실을, 헤어진 날 저녁 프사로 알았다.
그 사람이 잠깐 폰을 두고 화장실에 간 사이, 별생각 없이 사진첩을 열어봤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수천 장의 사진 중 99%가 나였다. 그것도 내가 카메라를 의식하고 찍은 사진이 아니라, 내가 전혀 모르는 순간의 나였다. 밥 먹다 웃는 옆모습, 졸다가 입 벌린 모습, 길 걷다 뒤돌아보는 찰나. 누군가의 시선에 내가 그렇게 많이, 그렇게 오래 담겨 있다는 게 울컥했다. 나는 나를 그저 평범하다고 여겼는데, 그 사람의 눈엔 매 순간이 담아두고 싶은 장면이었던 거다. 폰을 슬그머니 내려놓고, 돌아온 그 사람을 더 꼭 안았다.
몇 날 며칠을 고민해서 짝사랑에게 보낼 고백 영상을 찍었다. 떨리는 목소리로 내 마음을 담은, 인생을 건 영상이었다. 심호흡을 하고 전송 버튼을 눌렀다. 그런데 전송하고 나서 화면을 보니, 받는 사람이 짝사랑이 아니라 가족 단톡방이었다. 엄마, 아빠, 누나가 다 있는 그곳에. 손이 떨려서 삭제할 새도 없이, 이미 '읽음' 숫자가 줄어들고 있었다. 곧바로 엄마가 답했다. "우리 아들 멋지다, 잘했어!" 아빠는 "근데 걔가 누구냐?" 하며 캐묻기 시작했다. 고백은 짝사랑한테 닿기도 전에, 온 가족의 회의 안건이 됐다. 그날 저녁 식탁에서 나는 고백의 상대부터 진행 상황까지 전부 브리핑해야 했다.
결혼식이 끝나고, 신혼여행 가기 전에 방명록을 정리하다가 묘한 걸 발견했다. 신랑 측 친구 한 명과 내 친구 한 명이, 같은 페이지에 똑같은 문구를 남겨놨다. "오빠 또 봐요♡" 처음엔 그냥 우연이려니 했다. 그런데 필체와 표현이 이상하게 닮아 있었고, 곰곰이 따져보니 그 두 하객이 같은 사람의 '그 시절 애인'들이었다. 양쪽 다 모른 채 한 결혼식에 와 있던 거다. 내 결혼식이 졸지에 누군가의 양다리 현장 검증장이 됐다. 방명록 한 장이 몇 년 묵은 비밀을 들춰낸 셈이었다. 나는 그 페이지를 조용히 사진으로만 남겨뒀다. 차마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헤어지던 날, 홧김에 그 사람을 바로 차단했다. 다신 연락 안 받겠다는 다짐이었다. 그게 벌써 6개월 전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차단 목록에서 그 이름만큼은 지우질 못한다. 차단을 풀고 싶은 게 아니다. 그 이름을 목록에서 완전히 삭제하는 게 무서운 거다. 지우는 순간 정말로 끝일 것 같아서. 그제야 깨달았다. 나에게 차단은 미움이 아니었다. 그건 내가 그 사람과 이어진 마지막 연결고리였다. 차단된 채로라도 그 이름이 내 폰 어딘가에 남아 있다는 사실이, 아직 완전히 놓지 못한 내 마음의 증거였다.
우리 사이엔 7시간의 시차가 있다. 내가 하루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 때, 그 사람은 막 점심을 먹는 시간이다. 그래서 우리의 인사는 늘 어긋난 듯 맞물린다. 내가 "잘 자" 하면 그 사람은 "맛있게 먹어" 하고, 그 사람이 "좋은 하루 보내" 할 때 나는 이미 꿈속이다. 매일 그렇게 두 개의 시간이 교차하며 흘러간다. 처음엔 이 어긋남이 서럽기도 했다. 같은 순간을 살 수 없다는 게. 그런데 이제는 안다. 같은 하늘 아래가 아니어도, 서로의 시간을 챙겨주는 마음만 같으면 됐다. 7시간의 거리도 마음 앞에선 별것 아니었다.
그 사람 출근 동선을 어떻게든 알아내려고 몇 주를 관찰했다. 그래서 일부러 우리 집에서 두 정거장이나 떨어진 정류장까지 걸어가서 버스를 탄다. "어, 여기서도 봐요?" 하고 우연인 척 인사하려는, 나름의 치밀한 작전이었다. 매일 아침 거울 보고 표정 연습까지 했다. 그런데 오늘은 그쪽이 먼저 웃으면서 말을 걸었다. "오늘도 여기서 타시네요." '오늘도'라는 그 단어에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내 작전이 들킨 건지, 아니면 그쪽도 알면서 받아주는 건지, 버스 타고 가는 내내 그 한마디만 곱씹었다.
조별과제가 어제부로 완전히 끝났다. 발표도 했고 점수도 나왔다. 더 이상 연락할 이유가 하나도 없는 사이다. 그런데 오늘 그 사람한테 카톡이 왔다. "아 이 자료도 도움 될 것 같아서요" 하면서 PDF 한 장을 보냈다. 솔직히 이미 끝난 과제에 전혀 필요 없는 자료였다. 핑계인 걸 안다. 명백한 핑계다. 그런데도 나는 또 "오 감사해요! 도움 많이 되겠다" 하고 호들갑을 떨며 받았다. 핑계인 줄 알면서 설레는 내가 한심한데, 그 핑계를 만들어준 그 마음이 또 좋아서 어쩔 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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