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만난 2시간의 기록
솔직히 소개팅 내내 별 감흥이 없었다. 나쁘진 않은데 딱히 끌리지도 않는, 그저 그런 만남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헤어지면 다신 안 보겠구나 싶었다. 그런데 지하철역 앞에서 헤어지려는데, 그 사람이 머뭇거리다 말했다. "집 도착하면 꼭 연락 줘요. 무사히 갔는지 걱정되니까." 그 한마디에 발걸음이 멈췄다. 별것 아닌 끝인사인데, 그 진심 어린 걱정이 두 시간의 무덤덤함을 한순간에 뒤집었다. 집에 가는 내내 그 말이 맴돌았고, 결국 도착하자마자 내가 먼저 길게 연락을 보냈다. 끝인사인 줄 알았던 그 말이, 우리의 시작이 됐다.
소개팅이 끝나고 카페 밖으로 나오니, 예보에 없던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둘 다 우산이 없나 했는데, 그 사람 가방에 접이식 우산이 딱 하나 있었다. 혼자 쓰고 갈 법도 한데, 그 사람은 망설임 없이 우산을 펴고 말했다. "제가 댁까지 데려다드릴게요. 비 맞으면 안 되죠." 알고 보니 그 사람 집은 정반대 방향이었다. 나를 데려다주면 한참을 돌아가야 했다. 그런데도 끝까지 내 어깨가 안 젖게 우산을 내 쪽으로 기울여줬다. 첫 만남에 이 정도 호의를 보이는 사람이라면, 답은 이미 정해진 거였다. 나는 그 빗속에서 마음을 정했다.
소개팅 첫 만남이었다. 긴장한 탓인지 음료를 마시다 그만 사레가 들려 한참을 콜록거렸다. 민망해서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 순간 상대는 아무 말 없이 일어나, 정수기에서 시원한 물 한 컵을 떠다 내 앞에 놓아줬다. 호들갑 떨지도, 괜찮냐고 물어 더 민망하게 만들지도 않고, 그냥 조용히 물만 건넸다. 별것 아닌 1초의 배려였는데, 그게 2시간의 대화보다 더 크게 다가왔다. 말로 잘 보이려는 사람은 많지만, 행동으로 챙겨주는 사람은 드물다. 우리는 다음 주에 또 만났고, 그 물 한 컵이 시작이었다.
소개팅 장소에서 상대를 보고 살짝 당황했다. 프로필 사진과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흔히 말하는 '사진 사기'를 당했나 싶어 순간 긴장했다. 그런데 대화를 나눌수록 알게 됐다. 실물이 사진보다 훨씬, 비교도 안 되게 매력적이었다. 사진엔 절대 안 담기는 게 있었다. 말할 때 살짝 올라가는 입꼬리, 웃을 때 눈가에 잡히는 주름, 부드러운 목소리와 다정한 말투. 그런 건 한 장의 정지된 사진으론 절대 담을 수 없는 거였다. 흔히 말하는 사진 사기의 정반대 버전이었다. 나는 그날, 사진보다 백 배는 좋은 사람을 만났다.
소개팅 장소로 데려간 카페가 어쩐지 너무 내 취향이었다. 좋아하는 인테리어, 즐겨 마시는 원두, 심지어 내가 자주 시키는 디저트까지 다 있었다. 우연이라기엔 너무 완벽해서 슬쩍 물어봤더니, 알고 보니 주선자한테 미리 내 취향을 꼬치꼬치 물어보고 그에 딱 맞는 곳을 찾아왔다고 했다. 며칠을 검색했단다. 그 순간 느껴졌다. 이 사람은 이 만남을 진지하게 준비했구나. 노력은 어떻게든 티가 난다. 화려한 말솜씨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들인 그 준비가 훨씬 더 마음을 움직였다. 나는 그날 커피보다 그 정성에 취했다.
1차 카페에서의 대화가 생각보다 즐거웠다. 헤어지기 아쉬워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2차 가실래요?" 거절당할까 봐 살짝 긴장하면서. 그런데 상대의 대답이 뜻밖이었다. "네! 사실 근처에 분위기 좋은 와인바 미리 찾아놨어요." 이미 알아봐 뒀다는 거였다. 만나기도 전부터, 1차가 잘 풀리면 2차로 갈 곳까지 점찍어 둔 거였다. 그 순간 모든 게 명확해졌다. 2차 장소를 미리 알아봤다는 건, 처음부터 이 만남에 마음이 있었다는 확실한 증거였다. 잘 안 될 거라 생각했으면 굳이 그럴 이유가 없으니까. 그날 우리는 와인바에서 새벽까지 이야기했다.
프로필만 봤을 땐 솔직히 안 맞겠다 싶었다. 취향도, MBTI도, 좋아하는 음식도 죄다 정반대였다. 공통점이 단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막상 만나서 얘기를 나누니, 그 다름이 오히려 끝없는 대화거리가 됐다. "어떻게 그걸 좋아해요?", "그건 또 왜 싫어해요?" 하면서 서로를 신기해하다 보니, 어느새 4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그제야 알았다. 나랑 똑같은 사람보다, 나랑 다른 사람이 훨씬 더 궁금한 법이라는 걸. 똑같으면 금방 알아버리지만, 다르면 알아갈 게 끝없이 남는다. 우리는 그 다름이 좋아서 또 만나기로 했다.
소개팅이 끝나고 계산할 시간이 됐다. 서로 자기가 내겠다며 카드를 꺼냈다. "제가 낼게요", "아니에요 제가요" 하다가, 결국 둘이 동시에 카드를 단말기에 들이밀었다. 카드 두 장이 단말기에서 부딪혔다. 점원이 그 광경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고, 우리도 머쓱해서 따라 웃었다. 어색했던 분위기가 그 한순간에 와르르 풀렸다. 결국 가위바위보로 정했는데, 그 유치한 신경전을 벌이는 동안 묘하게 정이 들었다. 계산을 누가 했는지는 기억도 안 난다. 다만 그 어색하고도 다정한 실랑이가, 다음 만남으로 이어졌다는 것만 기억한다.
소개팅 자리에 앉은 상대를 보고 숨이 턱 막혔다. 전 애인과 너무 닮아 있었다. 눈매도, 웃는 표정도, 심지어 말투까지. 도무지 그 자리에 앉아 있을 수가 없어서, 1차가 끝나자마자 핑계를 대고 도망쳤다.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일주일이 지나도록 그 얼굴이 자꾸만 아른거렸다. 잊으려 할수록 더 선명해졌다. 결국 깨달았다. 나는 그 사람이 전 애인을 닮아서 피한 게 아니었다. 닮아서, 나도 모르게 끌렸던 거다. 그래서 도망쳤던 거다. 흔들리는 게 무서워서. 일주일째 폰을 들었다 놨다 하다가, 결국 "혹시 한 번 더 볼 수 있을까요" 하고 보냈다.
소개팅 자리에 앉은 지 딱 30분쯤 됐을까. 상대가 갑자기 자세를 고쳐 앉더니, 담담하게 말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제 스타일은 아닌 것 같아요. 시간 뺏기 전에 일어날게요." 순간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멍했다. 살면서 이렇게 직접적인 거절은 처음이었다. 충격을 받아 한동안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집에 돌아오는 길에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 솔직함이 차라리 고마웠다. 끌리지도 않으면서 2시간을 억지로 연기하는 것보다, 30분의 진심이 훨씬 나았다. 상처는 빨리 아물었고, 나는 그 사람의 솔직함만큼은 오래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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