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만난 2시간의 기록
소개팅 상대 얼굴을 마주 보기가 어쩐지 부끄러웠다. 그래서 메뉴판을 펼쳐 든 채, 그 너머로 슬쩍 상대 얼굴을 훔쳐봤다. 들키지 않게 조심조심. 그런데 메뉴판 위로 시선을 살짝 올린 순간, 상대도 똑같이 메뉴판으로 얼굴을 반쯤 가린 채 나를 훔쳐보고 있었다. 메뉴판 너머로 눈이 정통으로 마주쳤다. 둘 다 화들짝 놀라서, 약속이라도 한 듯 메뉴판을 더 높이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메뉴판 뒤에서 각자 혼자 웃었다. 음식은 한참 뒤에야 시켰다. 그 어설프고 수줍은 눈맞춤이, 우리 첫 만남의 가장 선명한 장면이 됐다.
소개팅이 끝나고 카페 밖으로 나오니, 예보에 없던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둘 다 우산이 없나 했는데, 그 사람 가방에 접이식 우산이 딱 하나 있었다. 혼자 쓰고 갈 법도 한데, 그 사람은 망설임 없이 우산을 펴고 말했다. "제가 댁까지 데려다드릴게요. 비 맞으면 안 되죠." 알고 보니 그 사람 집은 정반대 방향이었다. 나를 데려다주면 한참을 돌아가야 했다. 그런데도 끝까지 내 어깨가 안 젖게 우산을 내 쪽으로 기울여줬다. 첫 만남에 이 정도 호의를 보이는 사람이라면, 답은 이미 정해진 거였다. 나는 그 빗속에서 마음을 정했다.
소개팅 장소로 데려간 카페가 어쩐지 너무 내 취향이었다. 좋아하는 인테리어, 즐겨 마시는 원두, 심지어 내가 자주 시키는 디저트까지 다 있었다. 우연이라기엔 너무 완벽해서 슬쩍 물어봤더니, 알고 보니 주선자한테 미리 내 취향을 꼬치꼬치 물어보고 그에 딱 맞는 곳을 찾아왔다고 했다. 며칠을 검색했단다. 그 순간 느껴졌다. 이 사람은 이 만남을 진지하게 준비했구나. 노력은 어떻게든 티가 난다. 화려한 말솜씨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들인 그 준비가 훨씬 더 마음을 움직였다. 나는 그날 커피보다 그 정성에 취했다.
소개팅 첫 만남이었다. 긴장한 탓인지 음료를 마시다 그만 사레가 들려 한참을 콜록거렸다. 민망해서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 순간 상대는 아무 말 없이 일어나, 정수기에서 시원한 물 한 컵을 떠다 내 앞에 놓아줬다. 호들갑 떨지도, 괜찮냐고 물어 더 민망하게 만들지도 않고, 그냥 조용히 물만 건넸다. 별것 아닌 1초의 배려였는데, 그게 2시간의 대화보다 더 크게 다가왔다. 말로 잘 보이려는 사람은 많지만, 행동으로 챙겨주는 사람은 드물다. 우리는 다음 주에 또 만났고, 그 물 한 컵이 시작이었다.
소개팅 장소에서 상대를 보고 살짝 당황했다. 프로필 사진과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흔히 말하는 '사진 사기'를 당했나 싶어 순간 긴장했다. 그런데 대화를 나눌수록 알게 됐다. 실물이 사진보다 훨씬, 비교도 안 되게 매력적이었다. 사진엔 절대 안 담기는 게 있었다. 말할 때 살짝 올라가는 입꼬리, 웃을 때 눈가에 잡히는 주름, 부드러운 목소리와 다정한 말투. 그런 건 한 장의 정지된 사진으론 절대 담을 수 없는 거였다. 흔히 말하는 사진 사기의 정반대 버전이었다. 나는 그날, 사진보다 백 배는 좋은 사람을 만났다.
셋이 같이 보기로 한 소개팅이었다. 그런데 약속 시간 직전, 주선자가 "미안 갑자기 일 생겼어, 둘이 잘 해봐!" 하고는 연락을 끊었다. 결국 처음 보는 둘만 덩그러니 남았다. 첫 만남부터 둘이라니, 어색해서 죽을 것 같았다. 그런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주선자 욕이 터져 나왔다. "이게 무슨 매너람", "진짜 너무하지 않아요?" 하면서 깔깔 웃다 보니 어느새 대화가 술술 풀렸다. 공공의 적이 생기니 순식간에 같은 편이 됐다. 우리를 어색하게 만들었던 그 주선자가, 결과적으론 사랑의 큐피드가 된 셈이다. 다음 날 우리는 주선자에게 나란히 고맙다는 톡을 보냈다.
1차 카페에서의 대화가 생각보다 즐거웠다. 헤어지기 아쉬워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2차 가실래요?" 거절당할까 봐 살짝 긴장하면서. 그런데 상대의 대답이 뜻밖이었다. "네! 사실 근처에 분위기 좋은 와인바 미리 찾아놨어요." 이미 알아봐 뒀다는 거였다. 만나기도 전부터, 1차가 잘 풀리면 2차로 갈 곳까지 점찍어 둔 거였다. 그 순간 모든 게 명확해졌다. 2차 장소를 미리 알아봤다는 건, 처음부터 이 만남에 마음이 있었다는 확실한 증거였다. 잘 안 될 거라 생각했으면 굳이 그럴 이유가 없으니까. 그날 우리는 와인바에서 새벽까지 이야기했다.
프로필만 봤을 땐 솔직히 안 맞겠다 싶었다. 취향도, MBTI도, 좋아하는 음식도 죄다 정반대였다. 공통점이 단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막상 만나서 얘기를 나누니, 그 다름이 오히려 끝없는 대화거리가 됐다. "어떻게 그걸 좋아해요?", "그건 또 왜 싫어해요?" 하면서 서로를 신기해하다 보니, 어느새 4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그제야 알았다. 나랑 똑같은 사람보다, 나랑 다른 사람이 훨씬 더 궁금한 법이라는 걸. 똑같으면 금방 알아버리지만, 다르면 알아갈 게 끝없이 남는다. 우리는 그 다름이 좋아서 또 만나기로 했다.
소개팅이 끝나고 계산할 시간이 됐다. 서로 자기가 내겠다며 카드를 꺼냈다. "제가 낼게요", "아니에요 제가요" 하다가, 결국 둘이 동시에 카드를 단말기에 들이밀었다. 카드 두 장이 단말기에서 부딪혔다. 점원이 그 광경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고, 우리도 머쓱해서 따라 웃었다. 어색했던 분위기가 그 한순간에 와르르 풀렸다. 결국 가위바위보로 정했는데, 그 유치한 신경전을 벌이는 동안 묘하게 정이 들었다. 계산을 누가 했는지는 기억도 안 난다. 다만 그 어색하고도 다정한 실랑이가, 다음 만남으로 이어졌다는 것만 기억한다.
소개팅 자리에 앉은 상대를 보고 숨이 턱 막혔다. 전 애인과 너무 닮아 있었다. 눈매도, 웃는 표정도, 심지어 말투까지. 도무지 그 자리에 앉아 있을 수가 없어서, 1차가 끝나자마자 핑계를 대고 도망쳤다.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일주일이 지나도록 그 얼굴이 자꾸만 아른거렸다. 잊으려 할수록 더 선명해졌다. 결국 깨달았다. 나는 그 사람이 전 애인을 닮아서 피한 게 아니었다. 닮아서, 나도 모르게 끌렸던 거다. 그래서 도망쳤던 거다. 흔들리는 게 무서워서. 일주일째 폰을 들었다 놨다 하다가, 결국 "혹시 한 번 더 볼 수 있을까요" 하고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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