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못 한 마음의 기록
10년 만의 고등학교 동창회였다. 한참 떠들다가, 3년 내내 짝꿍이었던 애가 술기운에 툭 던졌다. "너 그때 내가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르지?" 순간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사실 나도 그때 너 좋아했었다고, 너만 보면 심장이 뛰었다고 말하려고 입을 떼는 순간, 그 애 옆자리에서 누가 다정하게 팔짱을 꼈다. 여자친구라며 소개해줬다. 그 말을 7년이나 가슴에 묻고 살았는데, 꺼내려는 그 1초 사이에 모든 게 무너졌다. 나는 웃으며 "전혀 몰랐네" 하고 잔을 들었다. 타이밍은 늘 이렇게 잔인하다.
퇴근길에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다. 편의점 처마 밑에서 같이 비를 피하다가, 그 사람이 작은 우산 하나를 펴서 "같이 쓰죠" 했다. 지하철역까지 딱 7분. 우산이 작아서 내 왼쪽 어깨가 다 젖는데도 나는 차마 가운데로 더 붙질 못했다. 어색한 침묵 속에 빗소리만 또렷했고, 괜히 발끝만 봤다. 헤어지고 나서 문득 그 사람 어깨를 봤는데, 그쪽도 한쪽이 흠뻑 젖어 있었다. 둘 다 가운데로 안 갔던 거다. 그 7분 동안 우리는 같은 마음으로 서로를 배려하느라 둘 다 젖었다. 이게 대체 무슨 마음일까.
두 달 전쯤, 여럿이 모인 자리에서 MBTI 얘기가 나와서 내 유형을 지나가듯 한 번 말한 적이 있다. 정말 스쳐 지나간 대화였다. 그런데 오늘 둘이 잠깐 얘기하다가, 내가 어떤 결정을 망설이니까 그 사람이 웃으면서 그랬다. "너 ENFP라 이럴 줄 알았어." 순간 심장이 바닥까지 내려앉았다. 두 달 전 한 번 말한 걸, 그것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사람은 결국 관심 있는 것만 외운다.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내 사소한 정보 하나를 기억해줬다는 게, 그날 하루 종일 나를 붕 뜨게 만들었다.
그 사람 출근 동선을 어떻게든 알아내려고 몇 주를 관찰했다. 그래서 일부러 우리 집에서 두 정거장이나 떨어진 정류장까지 걸어가서 버스를 탄다. "어, 여기서도 봐요?" 하고 우연인 척 인사하려는, 나름의 치밀한 작전이었다. 매일 아침 거울 보고 표정 연습까지 했다. 그런데 오늘은 그쪽이 먼저 웃으면서 말을 걸었다. "오늘도 여기서 타시네요." '오늘도'라는 그 단어에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내 작전이 들킨 건지, 아니면 그쪽도 알면서 받아주는 건지, 버스 타고 가는 내내 그 한마디만 곱씹었다.
단톡방에선 내 메시지에 제일 먼저, 제일 많이 반응을 눌러주는 사람이다. 그래서 처음엔 나한테 관심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큰맘 먹고 1:1로 톡을 보내면 답이 항상 12시간 뒤에 온다. 그것도 단답으로. 친구들은 "바빠서 그래"라고 위로하지만, 사실 나는 안다. 단톡방 안에서의 나는, 그 사람에게 딱 안전한 거리에 있는 여러 명 중 하나일 뿐이라는 걸. 가까이 다가가는 순간 그 거리가 무너진다는 걸, 그래서 답이 늦는다는 걸. 알면서도 또 1:1 창을 연다.
매일 저녁 7시, 헬스장에서 마주치는 사람이 있다. 말은 한마디도 안 해봤다. 그냥 거울 너머로 가끔 눈이 스칠 뿐이다. 오늘은 늘 쓰던 덤벨이 안 보여서 한참 두리번거렸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말없이 자기 옆에 있던 덤벨 하나를 슥 밀어줬다. 고맙다고 할 새도 없이 다시 자기 운동을 했다. 운동 끝나고 가방 챙기는데, 정수기 옆에 이온음료 한 병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이름표도 메모도 없었다. 누가 봐도 내 거 같은데, 또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 병을 들까 말까 5분을 서 있었다.
3년째 같은 카페를 다닌다. 솔직히 커피 맛 때문은 아니다. 주문할 때마다 딱 1초, 그 사람과 눈 마주치는 게 사실 내 하루의 전부였다. 어제는 큰맘 먹고 용기를 냈다. "아이스아메리카노 말고 추천 좀 해주세요" 했더니, 잠깐 망설이다가 "저랑 같은 거 드실래요?" 하면서 라떼를 내줬다. 받아 든 컵이 미지근하게 손에 닿았는데 얼굴은 화끈거렸다. 집에 와서도 그 말이 머릿속을 떠나질 않는다. 그냥 추천일까, 아니면 뭔가 다른 뜻일까. 벌써 12시간째 그 한마디를 분석 중이다.
조별과제가 어제부로 완전히 끝났다. 발표도 했고 점수도 나왔다. 더 이상 연락할 이유가 하나도 없는 사이다. 그런데 오늘 그 사람한테 카톡이 왔다. "아 이 자료도 도움 될 것 같아서요" 하면서 PDF 한 장을 보냈다. 솔직히 이미 끝난 과제에 전혀 필요 없는 자료였다. 핑계인 걸 안다. 명백한 핑계다. 그런데도 나는 또 "오 감사해요! 도움 많이 되겠다" 하고 호들갑을 떨며 받았다. 핑계인 줄 알면서 설레는 내가 한심한데, 그 핑계를 만들어준 그 마음이 또 좋아서 어쩔 줄 모르겠다.
동아리 정기 공지가 단체 메일로 왔다. 별생각 없이 읽다가 멈칫했다. 다른 사람들 메일은 "○○ 님"인데, 내 메일만 "○○야 이번엔 꼭 와줘"였다. 혹시 착각인가 싶어서 다른 부원 두 명한테 캡처 좀 보여달라고 했다. 진짜였다. 딱 나한테만 '님'을 떼고 이름을 불렀고, 한 줄을 더 붙였다. 그 밤을 새웠다. 답장 한 줄을 30번도 넘게 고쳐 썼다. "네 갈게요"는 너무 짧고, 길게 쓰면 티 날 것 같고. 결국 새벽 4시에 "네, 꼭 갈게요!" 하나 보내고 이불을 뒤집어썼다.
전공 강의실에서 그 사람은 늘 내 대각선 뒤쪽에 앉는다. 한 학기 내내 패턴이 똑같다. 바로 옆자리는 비어 있어도 절대 오지 않는다. 처음엔 나를 불편해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내가 감기로 결석한 날, 한 장도 빠짐없이 정리한 필기를 통째로 사진 찍어 보내줬다. 그것도 형광펜까지 쳐가며. 옆엔 끝까지 못 앉으면서, 노트는 한 장도 빠짐없이 챙겨주는 그 거리감. 가까이 오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모른 척하지도 못하는 그 어정쩡한 마음이 나는 미치겠다. 나도 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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