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 그리고 가끔의 다시
3년을 만난 사람과 헤어졌다. 길었던 시간에 비하면 끝은 너무 간단했다. 마지막으로 주고받은 톡은 딱 세 글자, "잘 지내"였다. 그 짧은 말이 이렇게까지 잔인할 줄은 몰랐다. 잘 지내라니. 나는 지금 하나도 잘 못 지내고 있는데, 밥도 못 넘기고 밤마다 그 사람 생각에 잠도 못 자는데. 잘 지내라는 그 다정한 말이, 사실은 '이제 너 없이도 잘 살아라'는 통보처럼 들렸다. 나는 그 세 글자를 지우지도 못하고, 답하지도 못한 채 오늘도 톡창을 열었다 닫았다 한다. 잘 지내라는 말이 가장 잔인한 작별이 될 수 있다는 걸, 그때 알았다.
헤어진 전 애인에게서 청첩장이 왔다. 마음을 다잡고 봉투를 열었는데, 청첩장 배경 사진을 보고 숨이 멎었다. 우리가 연애 시절 자주 가던, 둘만의 단골 카페였다. 우연이겠지 하고 애써 넘기려는데, 신랑 이름 옆 예식장 정보를 보고 또 한 번 무너졌다. 우리가 "나중에 결혼하면 여기서 하자"고 농담처럼 정해뒀던 바로 그 식장이었다. 우리의 추억으로 남의 시작을 채워가는 그 사람을 보며, 씁쓸함이 목까지 차올랐다. 그 카페도, 그 식장도, 이제 더는 우리 것이 아니었다. 청첩장을 조용히 서랍 깊숙이 넣었다.
3년 만이었다.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다 우연히 마주쳤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둘 다 어색하게 "어… 안녕" 정도만 하고 각자 길을 갔다. 그렇게 스쳐 지나 10미터쯤 걸었을까. 무언가에 이끌리듯 뒤를 돌아봤다. 그 순간, 그 사람도 정확히 같은 타이밍에 뒤를 돌아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고,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피식 웃었다. 아무 말도 더 하지 않았다. 그냥 그렇게 웃고는 각자 가던 길을 갔다. 끝난 사랑도 가끔은 이렇게 인사를 한다. 미련도 후회도 아닌, 한때 서로의 전부였던 사람에게 보내는 마지막 안부 같은 것이었다.
사귈 때 그 사람은 비 예보만 뜨면 꼭 "우산 챙겨"라고 톡을 보냈다. 그게 그 사람의 다정함이었다. 헤어지고 처음 맞는 장마. 아침부터 비가 쏟아지자마자, 핸드폰에 그 이름으로 톡이 떴다. "우산 챙겨." 습관처럼 손가락이 먼저 움직였던 모양이다. 그리고 1초 만에, 그 톡은 '삭제된 메시지입니다'로 바뀌었다. 하지만 나는 봤다. 분명히 봤다. 헤어지고도 비만 오면 나를 떠올리는, 보내려다 황급히 지운 그 마음을. 그 1초가 나를 또 며칠을 흔들었다. 어떤 습관은 마음보다 오래 남는다.
1년 만에 다시 만났다. 카페에 마주 앉아 한참을 어색하게 서로 눈치만 봤다.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몰라 손에 든 컵만 만지작거렸다. 그러다 그 사람이 먼저 입을 뗐다. "밥은… 먹었어?" 그 흔하고 평범한 한마디에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헤어질 때 우리가 끝내 못 했던, 가장 사소하고 다정한 말이었다. 그제야 알았다. 우리가 헤어진 이유는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이런 말을 제때 못 한 표현의 부족 때문이었다는 걸. 밥 먹었냐는 그 한마디면 됐을 텐데. 우리는 그걸 1년이나 돌아 다시 마주 앉아서야 겨우 했다.
헤어진 지 한 달이 지났다. 이제 좀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 욕실을 정리하다가, 컵 안에서 그 사람 칫솔을 발견했다. 자주 우리 집에 오던 사람이라 칫솔까지 둬뒀던 거다. 버리려고 손에 들었는데, 손가락이 말을 안 들었다. 이걸 버리면 정말로 다 끝나버릴 것 같아서, 결국 다시 컵에 꽂아뒀다. 사람은 떠났는데 물건은 아직 그대로다. 물건은 늘 사람보다 늦게 떠난다. 그 칫솔 하나가 아직도 우리가 함께였던 시간을 붙잡고 있는 것 같아서, 나는 오늘도 그걸 못 버렸다.
헤어지던 날, 우리는 서로 쿨한 척하며 약속했다. "우리 그래도 좋은 친구로 지내자." 마치 그게 가장 어른스러운 마무리인 것처럼. 그런데 그날 이후로 둘 다 단 한 번도 먼저 연락하지 않았다. 친구로 지내자던 사람들이, 일주일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도 안부 한 줄 묻지 않았다. 좋은 친구는커녕 남보다 더 멀어졌다. 그제야 알았다. "좋은 친구로 지내자"는 말은 사실 "이제 더는 안 보겠다"는 뜻의, 가장 예의 바른 포장이었다. 차마 "잘 가"라고 못 해서 "친구로 지내자"고 했던 거다. 우리는 그렇게 정중하게, 영영 멀어졌다.
연애할 때 둘이 같이 만들던 플레이리스트가 있다. 좋아하는 노래가 생길 때마다 서로 한 곡씩 추가하며 채워가던, 우리만의 앨범 같은 거였다. 헤어지고도 그걸 차마 못 지웠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들어가 보니, 못 보던 노래가 한 곡 늘어 있었다. 그 사람이 헤어진 뒤에도 가끔 노래를 추가하고 있었던 거다. 우리는 더 이상 연락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사람은 말 대신 음악으로 "나 아직 여기 있어" 하고 신호를 보내는 것 같았다. 나는 답장 대신, 그 플리에 조용히 노래 한 곡을 더 얹었다.
헤어지고 친구들 손에 이끌려 노래방에 갔다. 분위기 좀 풀어보려고 신나는 곡을 부르다가, 다음 곡을 고르는데 손이 멋대로 움직였다. 나도 모르게 그 사람 18번을 예약하고 있었다. 둘이 노래방 갈 때마다 늘 그 사람이 부르던, 내가 옆에서 박수 치며 듣던 그 노래. 화면에 가사가 한 줄씩 올라오는데, 첫 소절도 못 부르고 마이크를 든 채 그냥 울었다. 친구들이 놀라서 노래를 껐다. 추억은 결국 멜로디에 박제되는 거더라. 이성으로는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익숙한 전주 몇 마디에 마음은 그대로 1년 전으로 돌아가 있었다.
헤어진 지 한참 지나 까맣게 잊고 있던 일이었다. 예전에 그 사람 집으로 주문해둔 택배가, 받는 사람이 없다며 며칠을 떠돌다 결국 나에게 반송됐다. 무심코 송장을 보다가 멈칫했다. 받는 사람 이름에 아직도 내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 사람이 자기 집 주소의 수령인을 아직도 내 이름으로 둔 거다. 헤어진 지가 언제인데. 주소를 못 바꾼 건지, 아니면 일부러 안 바꾼 건지. 그게 무심함인지 미련인지, 나는 그 사람에게 묻고 싶었다. 하지만 끝내 묻지 못했다. 그 택배 상자를 들고 한참을 현관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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