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선 모른 척
그토록 숨겨오던 사내연애를, 우리는 결국 결혼으로 공개했다. 몇 년간 들킬까 조마조마하던 날들이 무색하게, 청첩장을 돌리자 회사가 발칵 뒤집혔다. 알고 보니 우리는 회사 창립 이래 첫 사내 커플이었다. 그 소식에 사장님이 직접 나서서 "내가 주례를 서주겠다"고 했다. 사내 1호 커플의 결혼이라며, 회사 차원에서 축하해줬다. 그렇게 우리의 비밀 연애는, 회사의 전설이 되어 끝났다. 몰래 주고받던 탕비실 커피와 엘리베이터 손끝의 떨림이, 사장님 주례사 속 한 편의 이야기가 됐다. 비밀이 가장 떳떳한 자리에서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업무용 사내 메신저로 그 사람한테 자료를 요청하던 중이었다. 평소처럼 빠르게 타이핑을 하는데, 손가락이 습관대로 움직였다. "자기야, 그 파일 좀…" 까지 쳤다가, 전송 버튼을 누르기 0.1초 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여긴 카톡이 아니라 회사 메신저였다. 황급히 "자기야"를 지우고 "○○ 님"으로 고쳐서 보냈다. 손이 다 떨렸다. 사내 메신저와 카톡을 헷갈리는 그 순간, 사내연애는 늘 살얼음판 위를 걷는 기분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이런 아찔한 순간이 온다. 그날 이후로 메신저 보낼 땐 첫 글자부터 조심한다. 한 번 실수하면 모든 게 끝장이니까.
우리는 비밀리에 사내연애 중이다. 회사에선 철저하게 모른 척, 그냥 동료인 척 지낸다. 그게 규칙이다. 그런데 회의가 문제다. 유리벽 너머 다른 회의실에 그 사람이 보이면, 잠깐 눈만 마주쳐도 입꼬리가 제멋대로 올라간다. 표정 관리가 도무지 안 된다. 심각한 회의 중에 혼자 실실 웃고 있으니 이상해 보일 수밖에. 오늘은 옆자리 동료가 내 시선을 따라가더니 슬쩍 물었다. "너 혹시 저 사람이랑 뭐 있어?" 순간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무, 무슨 소리야" 하고 황급히 노트북으로 시선을 돌렸지만, 심장은 한참을 두근거렸다.
프로젝트 마감이 코앞이라, 사무실에 둘만 남아 야근을 하게 됐다. 다들 퇴근한 텅 빈 사무실. 배가 고파서 법인카드로 저녁을 시켰다. 야근 식대 명목이니 떳떳한데도, 둘이 마주 앉아 먹다 보니 이건 영락없는 데이트였다. 정산 항목엔 '야근 식대 2인'이라고 적었지만, 사실상 회사가 우리 데이트 비용을 모르게 대주고 있는 셈이었다. 불 꺼진 사무실에서 배달 음식을 나눠 먹으며 그 사람이 웃었다. "이거 완전 회사 돈으로 데이트네." 약간의 죄책감이 양념처럼 더해지니, 그 야근 저녁이 이상하게 더 맛있었다. 야근이 이렇게 달콤할 줄은 몰랐다.
우리는 같은 프로젝트에 투입돼 몇 달째 매일 붙어 일했다. 야근도, 회의도, 점심도 늘 함께였다. 일 때문에 붙어 있는 거지만, 사실 그게 우리에겐 매일의 데이트였다. 그런데 프로젝트가 곧 끝난다. 끝나면 우리는 각자 다른 부서로 흩어진다. 매일 보던 사람을 이제 어쩌다 한 번 복도에서 스칠 뿐이다. 일이 마무리되는 게 이렇게까지 아쉬운 적은 처음이었다. 마지막 야근을 하며 그 사람이 농담처럼 말했다. "우리 야근이 곧 데이트였네." 맞는 말이었다. 같이 일한다는 핑계로 누렸던 그 시간들이, 끝나간다고 생각하니 자료 정리하는 손이 자꾸 느려졌다.
아침에 출근해서 자리에 앉으면, 책상 위에 늘 따뜻한 커피 한 잔이 놓여 있다. 누가 가져다 놓는지 다들 모른다. 사실은 그 사람이다. CCTV 사각지대인 탕비실에서, 사람들 눈을 피해 몰래 타다가 슬쩍 내 자리에 올려두는 거다. 정확히 내 입맛에 맞춘 농도와 온도로. 매일 아침 그 커피를 발견하는 게 하루의 가장 큰 설렘이다. 카페인 때문이 아니라, 그 커피에 담긴 마음 때문에 잠이 확 깬다. 아무도 모르게, 매일 같은 자리에 놓이는 그 한 잔. 우리만 아는 아침 인사다. 나도 가끔은 그 사람 자리에 몰래 초콜릿을 두고 온다.
재택근무 중 팀 화상회의가 잡혔다. 다들 각자 집에서 카메라를 켜고 접속했다. 그 사람도 화면 한 칸에 등장했는데, 회의에 집중하던 나는 그 사람 뒤 배경을 보고 흠칫했다. 책장 위에, 내가 지난 기념일에 선물한 작은 인형이 떡하니 놓여 있었다. 화면에 또렷하게. 혹시 누가 알아볼까 봐 심장이 쿵쾅거렸다. 다행히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다들 회의 자료만 보느라 배경엔 관심도 없었다. 하지만 나는 회의 내내 그 인형만 쳐다봤다. 발표 내용은 하나도 안 들리고, 화면 속 그 인형이 우리 비밀을 들킬까 봐 조마조마했다. 회의가 끝나고 "인형 좀 치워둬" 하고 톡을 보냈다.
사내연애를 시작하면서 우리는 한 가지 약속을 했다. "둘 중 하나가 회사를 떠나면, 그때 당당하게 공개하자." 그때까진 철저히 비밀로 하기로. 그런데 막상 내가 이직이 확정되어 그날이 다가오니, 이상하게 공개가 망설여졌다. 떳떳하게 손잡고 다닐 수 있게 됐는데도 어쩐지 두려웠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어쩌면 우리는 '비밀'이라는 양념 때문에 더 두근거렸던 건 아닐까 싶었다. 들킬까 조마조마하던 그 스릴, 몰래 주고받던 눈빛. 그게 사라지면 우리도 평범해질까 봐. 공개를 앞두고 나는 괜히 복잡한 마음이 됐다.
회사에서 우리는 서로를 "○○ 님"이라고 부른다. 깍듯하게, 다른 동료들과 똑같이. 누가 봐도 그냥 직장 동료 사이다. 그런데 단둘이 남는 순간, 호칭이 바뀐다. 탕비실이든 비상계단이든,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면 그제야 서로의 이름을 부른다. 직급도 '님'도 떼고, 그냥 이름만. 그 순간 공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님'에서 이름으로 넘어가는 그 찰나가, 비밀 연애의 가장 짜릿한 묘미다. 같은 사람인데 호칭 하나로 두 개의 관계를 산다. 회사용 우리와 진짜 우리. 그 온오프 스위치를 누르는 순간이, 하루 중 가장 우리답다.
같이 여행을 가고 싶어도, 사내 커플이라 휴가를 같은 날 내면 의심받기 딱 좋다. 그래서 우리는 작전을 짠다. 휴가 신청서를 일부러 며칠 차이를 두고 낸다. 나는 월요일부터, 그 사람은 수요일부터. 부서도 다르게, 사유도 다르게 적어서 아무도 연결 짓지 못하게 한다. 그렇게 따로따로 떠나는 척하다가, 결국 같은 공항, 같은 호텔에서 만난다. 들키지 않게 작전을 짜는 그 과정이, 사실 여행만큼이나 재밌다. 몰래 맞춰가는 스릴, 완벽하게 속였을 때의 쾌감. 사내연애의 절반은 이 작전 짜는 재미인 것 같다. 이번 휴가도 우리는 감쪽같이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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