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썸일까 아닐까
비 예보가 있던 날, 그 사람이 가방에서 우산을 두 개나 꺼냈다. "너 우산 없을 것 같아서 하나 더 챙겼어. 이거 너 줄게." 준비성 좋다고 생각하며 고맙게 받았다. 그런데 막상 헤어질 시간이 되어 비가 쏟아지자, 그 사람은 자기 우산 하나만 펴고 "같이 쓰자" 했다. 내가 받은 우산은 펴지도 않았다. 역까지 걷는 내내, 가방 속에 멀쩡한 우산 두 번째가 들어 있었다. 처음부터 하나는 핑계였던 거다. 같이 쓰려고, 어깨 닿는 거리를 만들려고. 그 치밀한 다정함을 눈치챈 순간, 나는 이게 더 이상 썸이 아니라는 걸 확신했다.
퇴근 무렵에 톡이 왔다. "나 마침 너네 동네 일 있어서 왔는데, 커피 한잔 어때?" 마침이라는 말에 별생각 없이 좋다고 나갔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사람 회사도 집도 우리 동네에서 40분이나 떨어진 곳이었다. 이 동네에 올 일이라곤 단 하나도 없는 사람이었다. '마침'은 무슨, 작정하고 온 거였다. 그 어설픈 거짓말이 너무 빤히 보여서, 그래서 더 귀여웠다. 나는 끝까지 모른 척했다. "우와 진짜 우연이다" 하면서. 서로 빤한 거짓말을 모른 척 받아주는 게, 어쩌면 썸의 가장 다정한 예의일지도 모른다.
매일 밤 우리의 톡은 "잘 자"로 끝났다. 무난하고 다정한, 딱 썸의 거리에 있는 인사였다. 그런데 어제는 달랐다. "잘 자, 내 꿈 꿔." 화면을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심장이 뛰는 걸 들키기 싫어서 일부러 가볍게 "ㅋㅋ 뭐야" 하고 보냈다. 그랬더니 곧바로 답이 왔다. "진심인데?" 나는 폰을 그대로 침대에 던져버렸다. 천장을 보며 한참을 웃다가, 다시 폰을 집어 그 두 글자를 백 번쯤 더 읽었다. 그날 밤 잠은 다 잤다.
"친구들이랑 다 같이 영화 보기로 했는데 너도 와"라고 해서 가벼운 마음으로 갔다. 그런데 영화관 앞에 도착하니 그 사람 혼자였다. "걔네 갑자기 다들 일 생겼대, 우리끼리 보자." 아쉬운 척하는 표정이 어딘가 어색했다. 그런가 보다 하고 들어갔는데, 표를 받아 들고 좌석을 보는 순간 알아챘다. 좌석은 처음부터 딱 두 자리였다. 그것도 가운데 팔걸이가 없는 커플석. 여러 명이 보려던 자리가 아니었다. '갑자기'는 무슨. 처음부터 둘만 볼 작정이었던 거다. 그 치밀한 계획이 들켜서, 영화 내내 그 사람 얼굴이 빨갰다.
그 사람이 "요즘 이런 노래 듣는다"며 플레이리스트를 통째로 보내왔다. 별생각 없이 출근길에 틀었다가, 한 곡 한 곡 가사를 듣고 멈칫했다. 전부 고백 직전의, 마음을 들킬 듯 말 듯한 노래들이었다. 우연이라기엔 너무 일관됐다. 이건 음악으로 나를 떠보는 거였다. 직접 말하긴 무서우니까 노래 뒤에 마음을 숨긴 거다. 나도 가만있을 수 없었다. 비슷한 결의 노래들로 플리를 만들어 "나도 요즘 이거 들어" 하고 받아쳤다. 우리 둘 다 마음은 다 차 있으면서, 누구도 먼저 입을 못 떼고 음악 뒤에 숨는다. 솔직히 둘 다 비겁하다.
분명 "그냥 친구로 밥이나 먹자"고 만난 자리였다. 그런데 메뉴가 나오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연스럽게 접시를 나눠 먹기 시작했다. 결정적인 건 새우였다. 그 사람이 아무렇지 않게 새우 껍질을 까서 내 앞접시에 슥 올려놨다. 손에 양념 묻혀가며, 한 마리도 아니고 계속. 나는 젓가락을 멈추고 생각했다. 친구한테 새우 까서 접시에 올려주는 사람을, 살면서 본 적이 있던가? 나는 못 봤다. 우리는 분명 친구로 만났는데, 이 자리는 친구의 자리가 아니었다.
모임이 늦게 끝난 밤, 우리 집은 동쪽이고 그 사람 집은 정반대 서쪽이었다. 그런데도 자연스럽게 "데려다줄게" 하고 택시에 같이 탔다. 나를 먼저 내려준 다음, 그 사람은 거기서 다시 한참을 돌아가야 했다. 요금이 두 배는 더 나왔을 거다. 미터기 올라가는 걸 분명 봤을 텐데도 끝까지 "괜찮아" 했다. 나는 그 마음을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 "진짜 고마워, 조심히 들어가" 정도로만. 손해 보는 걸 알면서 돌아가는 사람과, 그 손해를 모른 척 받아주는 사람. 이 묘한 거리감이 썸의 정치학이다.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다. 어쩌다 둘이서만 쓰는 이상한 이모티콘 하나가 생겼다. 남들이 보면 "이게 뭐야" 할 만한, 맥락 없는 그림. 다른 사람한테 그걸 보내면 다들 어리둥절해한다. 그런데 우리끼린 그게 정확히 "보고 싶다"는 뜻이다. 말로 하긴 부끄러운 마음을 그림 하나에 숨겨두는 거다. 관계엔 둘만의 언어가 생기는 순간이 있다. 그 언어가 생겼다는 건, 우리가 이미 남들과는 다른 거리에 와 있다는 증거다. 오늘도 그 이모티콘 하나를 띄워놓고 보낼까 말까 한참을 고민했다.
별생각 없이 카톡 프로필 사진을 바꿨다. 새벽도 아니고 그냥 낮 시간이었다. 정확히 10분 뒤, 그 사람한테 톡이 왔다. "오 프사 바꿨네, 잘 어울려." 10분 만에 알아챘다는 건, 하루에도 몇 번씩 내 프로필을 들여다본다는 증거였다. 안 그러면 이렇게 빨리 알 리가 없다. 사실 나도 마찬가지다. 그 사람 프사가 바뀌면 5분 안에 알아챈다. 다만 나는 모른 척할 뿐이다. 서로 몰래 들여다보면서, 들켰을 때만 아무렇지 않은 척. 우린 그렇게 조용히 서로를 감시하는 사이가 됐다.
꽤 진지한 톡을 보냈는데 답이 없었다. 1시간, 2시간, 3시간. 읽음 표시만 떠 있고 감감무소식이었다. '아, 식었구나. 내가 너무 들이댔나.' 별별 생각을 다 하며 자책하고 있었다. 그냥 가볍게 넘길걸, 후회가 밀려왔다. 그런데 3시간 만에 온 답이 이랬다. "미안, 뭐라고 답해야 네가 좋아할까 고민하다 시간이 다 갔어." 순간 화가 싹 풀리고 그 자리에 설렘이 들어찼다. 빠른 답장보다, 한 글자를 고르느라 3시간을 망설인 답장이 훨씬 더 무섭다. 그 사람한테 완전히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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